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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정사 소식

10월 일요포살법회(10/12,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10-13 11:30 조회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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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추석연휴관계로 10월 포살법회를 한주늦춰 10/12(일) 여법하게 봉행합니다.

포살의식은 벽암 지홍큰스님께서 이끌어 주셨는데요. 매월 1차례 포살의식을 통해

한달살이를 참회와 점검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이후 석두스님(관악산 관음사 주지)께서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제목의 법문을

이어주십니다. 석두스님 법문영상은 금강정사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rP5v9-h4ugw

 

가피봉사자 분들의 작품같은 사진컷과 

재봉사팀 법승거사님께서는 정성스레 마지공양을 올립니다. 

점심공양 준비는 문수2구에서 국수공양을 준비합니다. 

 

이외에도 오늘 법회의 원만봉행을 위해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와 찬탄의 박수를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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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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迷生寂亂(미생적난)이요  -  미혹하면 고요함과 혼란이 생기고

悟無好惡(오무호오)라  -  깨달음에는 좋고 싫음이 없나니


미혹하다는 것은 불교적 진리를 모르고 살아가는 중생들의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요,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불교적 가치관 속에서 삶을 관조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미혹한 자에게 삶이란 늘 힘들고 어려운 것이요, 깨달은 자에게 삶이란 그렇고 그러한 것이라 애착하고 애달파 할 것이 없는 흐르는 강물 같은 것입니다. 


미혹하다는 것은 또한 지혜를 갖추지 못한 삶을 말하는 것이요,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늘 지혜를 갖추고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의 진리를 모르는 자는 미혹한 자를 말함이요, 인생의 진리를 아는 자는 깨달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미혹한 자의 삶의 모습과 깨달은 자의 삶의 모습은 겉으로는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인생에서의 힘든 상황은 누구에게나 그 무게감이 버겁고 어려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미혹한 사람이 위기를 대하는 태도 속에는 늘 밖으로만 향하는 원망과 불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니 그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를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근원적인 위기의 원인을 밖에서만 찾는다면 아마 결코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외부적 요인은 너무도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것이라 늘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어지럽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안정은 기대할 수조차 없습니다.


삶은 원래 정답이 없는 것이기에 만인이 있으면 만인의 삶의 모습이 있을 뿐입니다. 올바른 삶이 있고 바르지 못한 삶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미혹하면 고요하고 혼란이 있다고 했지만, 고요함과 혼란함이 어찌 별도로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손에게 애착하는 자에게 자손이 없으면 혼란하고 괴로운 것이요, 자손에게 집착하지 않는 자에게는 자손이 없는 것이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으니 고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요와 혼란은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요, 내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안목에 도달한다면 삶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로 삼고 있는 내가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삶의 바다 속에는 어려움이라는 파도가 늘 너울거립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바다와 파도는 둘이 아닙니다. 삶은 괴로운 것이며, 괴롭기 때문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늘 괴로움만 있는 삶도 없고, 늘 행복감만 있는 삶도 없습니다. 바다가 고요할 때도 있고 비바람이 몰아칠 때도 있습니다. 두 가지 모습이 본래 바다의 참모습입니다. 고요할 때는 그 고요함을 즐기며 행복해하면 됩니다. 파도가 치고 비바람이 불 것을 지레 겁먹고 지금의 행복감을 만끽하지 못한다면 그 또한 지혜롭지 못한 자라 할 것입니다. 깨달은 자에게는 좋아하고 미워함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는 좋아하고 미워하는 그 마음자리에 끄달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붓다께서 입멸한 후 가섭존자가 도착할 때까지 다비 장작에 불이 붙지 않았다고 합니다. 도착 후에 불이 붙고 양쪽 발을 보이셨다고 합니다. 붓다께서도 특별히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다면 아마도 두타제일 가섭존자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미워했던 제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원망하며 승단을 둘로 갈리게 한 사촌 동생인 제바달다조차도 미워하고 원망했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미혹된 자에게는 호오(好惡)가 있지만 깨달은 자에게는 호오(好惡)가 없고, 그 상황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태도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중생들에게 좋고 싫음의 태도는 삶 전체를 아우르는 피할 수 거대한 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 때문에 반복적으로 괴로움과 고통이 뒤따른다면 한 번쯤은 그 태도를 획기적으로 바꿔보면 어떨까요.

사랑하면 사랑 때문에 행복하지만 괴롭기도 합니다. 미워하면 또한 미워해서 더욱 괴롭습니다. 사랑도 치우치는 마음이요, 미워함도 한 쪽으로 치우친 마음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미움이 있고, 미움이 있기 때문에 사랑이 있게 됩니다.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그 중간의 어딘가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두 가지 마음에서 오는 행복과 불행으로 부터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중도적 삶의 태도란 사랑의 행복감 속에서도 그 사랑의 허무함을 아는 것이요, 미움의 그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 미움의 허망함을 아는 태도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집착에서 자유로운 것이며, 미움의 그 굴레에서도 빨리 탈출구를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허망함을 아는 자에게는 미움도 사랑도 마음껏 할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후유증이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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