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문화답사(12/14,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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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문화답사(12/14,목)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12-14 17:20 조회5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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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경찬교수님과 함께하는 12월 문화답사가 12월14일(목) 대중 30명이 동참한 가운데 

부여 정림사지, 논산 관촉사 및 개태사를 참배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번달에는 큰스님께서도 함께해 주셨네요 ^^

 

사찰안내는 아래 링크를 꾹 눌러주세요...  

 

부여 정림사지 _ https://m.cafe.daum.net/templegoman/Libn/54

논산 반야산 관촉사 _  https://m.cafe.daum.net/templegoman/Libn/55

논산 천호산 개태사 _  https://m.cafe.daum.net/templegoman/Libn/56

 

 

문화답사 소식.... 사진소식으로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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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정림사지 소개글

사적 제301호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연혁

정림사지는 백제시대의 옛 절터로 백제시대의 부여를 대표하는 곳이다. 백제에는 탑이 많았다고 하지만, 수도인 부여에 남은 것은 오직 정림사지오층석탑뿐이다.

1942년 절터 발굴 조사 중에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란 명문이 적혀 있는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태평 8년인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는 정림사로 불렸다. 하지만 백제 때의 이름은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1979년과 1980년 2년에 걸쳐 충남대학교박물관에서 전면 발굴 조사하였다. 백제시대, 고려시대의 막새기와편, 백제시대의 벼루·삼족토기(三足土器) 등이 출토되었다. 이때 가람의 규모와 배치, 1028년에 중건된 사실 등이 드러났다.

2008년∼2010년에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사역(寺域) 전체를 다시 발굴하였다. 기존 조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회랑 북단의 동서승방지와 강당지 뒤편의 북승방지를 확인하였다.

현재 절터에는 백제시대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고려시대의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이 남아 있다.

 

가람배치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자리하고, 강당 좌우의 부속건물과 중문을 연결하는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일탑식가람(一塔式伽藍)’ 배치다. 백제 사비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 양식이다. 단 정림사지는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이다.

중문 밖에는 동서 양쪽으로 각각 연못을 파서 다리를 통하여 건너가게 하였다. 현재까지 발굴된 가장 오래된 연못으로 삼국시대 사찰 조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한편 중국 북위 낙양의 영녕사나 일본 호류지(法隆寺) 오층목탑의 탑안에 소상을 모신 사례에 비춰볼 때, 정림사지 기와구덩이에서 출토된 소조상들은 목탑 내부에 모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림사지 오층석탑 건립 전에 오층목탑이 존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석탑은 미륵사지석탑(국보)과 더불어 백제 석탑이 목탑에서 변화를 준 것이라는 근거를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귀중한 자료다.

높이는 8.33m이며, 석탑의 구조는 지대석을 구축하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탑신부를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相輪部)를 형성하였다.

1963년 조사에서 4층 탑신 남면에 두께 13cm의 판석으로 가린 사리공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사리장치는 발견되지 않았다.

1942년 발굴 조사 중에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었다. 그리하여 이 절이 고려 초기에는 정림사라고 불렀던 것이 확실히 밝혀졌다. 그리하여 그 뒤 이 석탑의 명칭을 정림사지오층석탑이라 불렀다.

이 탑의 초층탑신에는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공을 기리는 글이 새겨져 있어서 한때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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