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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정사 소식

11월 호법법회 및 음력9월 지장재일(11/1,수)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11-01 16:16 조회5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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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부터 비가올듯 말듯 흐릿한 날씨로 찌뿌듯한 날 이네요. 오늘은 11월이 시작하는 첫째날로서 호법법회와 음력9월 지장재일이 있는 날 입니다. 

70여명의 사부대중이 한 목소리로 천수경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벽암 지홍스님께서는 오늘 법문의 포커스를 어디다 맞출것인지 고민하시다 호법에 치중하셨다고 하시며, "이 몸 바쳐 법등 밝힐 수 있다면 무얼 주저하랴"란 법문으로 허응 보우스님이 목숨까지 바쳐가며 불교를 지키려고 했던 일화를 법문으로  해 주셨습니다. 

사회의 변화로 변해가는 불교를 호법으로 전법을 해 나가야만 불교가 살수 있다는 말씀 

새기며 관음시식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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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몸 바쳐 법등 밝힐 수 있다면 무얼 주저하랴

(허응 보우스님)

 

벽암 지홍스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은 욕망의 충족이 될 수 있고, 때로는 무소유나 공익적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보우(普雨, 1515~1565)스님은 불교 발전을 위해 맨발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보우 스님은 어느 원로학자의 말처럼 몰상식하고 문화의식이 결여된 유생들의 만행과 역사적인 범죄가 극에 달했던조선시대 비운의 시기를 살아야 했다. 유생들은 사찰을 불태웠고 사찰의 재물과 보물을 약탈해 갔다. 스님들을 노예 취급했고 사대부들의 가마꾼 노릇을 해야 했다. 사찰에서 내쫓기고 여러 가지 구실로 구타하거나 심지어 살해해도 큰 죄가 되지 않았다.

 

여기에 국가권력은 한술 더 떴다. 똑같은 나라의 백성이건만 도첩이 없다는 이유로 스님들을 환속시켜 군대에 편입시키고 승과를 폐지함으로써 승려가 되는 길을 차단했다. 특히 연산군은 선종의 본산이었던 흥천사와 교종의 본산인 흥덕사를 연회소로 만들고, 원각사는 기방으로 만들기도 했다.

 

보우 스님은 이런 법란의 시대에 스스로를 불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 되고자 했던 고승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용문사로 입산한 스님은 15세 되던 해 금강산 마하연에서 본격적인 사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0여 년간 금강산에서 정진으로 큰 깨침을 얻은 스님은 그 후 주머니 속 송곳이 드러나듯 명성이 널리 퍼져나갔다.

 

15516, 불교중흥을 발원했던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봉은사 주지 및 선종판사에 임명된 스님은 보현사, 회암사 등 퇴락한 사찰을 중창했다. 특히 선종과 교종의 부활을 이끌고 승과를 다시 설치해 유능하고 합법적인 승려 배출에 힘썼다. 그 결과로 서산 휴정과 사명당 유정도 이러한 승과를 통해 배출된 인물이었다.

유생들의 끊이질 않는 질시와 모함. 그 속에서도 법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불교중흥에 헌신했던 보우 스님. 하지만 15656월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해 6월 스님은 제주도로 귀향가야 했고 그해 10월경 그곳에서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살해됐다.

 

스님의 삶은 명종 임금의 어머니이신 문정왕후의 삶과 궤적을 같이 하는 것 같은데 문정왕후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연산군과 중종 임금을 거치며 불교는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게 됐고, 승려들은 도둑으로, 절은 마군의 소굴로 취급받게 됐지요. 대신과 유생들의 극렬한 배불정책 속에서 불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때 문정왕후께서는 거센 반대여론을 친히 감수하시면서까지 큰 용기와 결단으로 불교부흥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그분은 보살의 화신이십니다.”

 

문정왕후께서 사신을 통해 선종판사와 봉은사 주지를 맡아달라고 당부하셨을 때 스님은 왕후의 조서에 처음 담장을 넘어 도망치려고 했고 귀를 씻고 못들은 것으로 하려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 직책을 맡으셨나요? “나는 지병으로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다오. 또 법랍으로 보더라도 나보다 위에 계신 스님들도 많았지요. 그런데 왜 하필 이 병든 산승일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지요. 선종판사의 길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소. 그런데 그건 내 바람일 뿐 그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고 불보살님과 중생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임을 아는데 어찌 피할 수 있겠소이까.”

 

스님이 선종판사가 되기도 전에 스님에 대한 비난과 함께 처벌하라는 상소가 조정에 수북이 쌓였습니다. 이를 조사한 어느 학자의 논문에 따르면 그 무렵에 무려 446건의 상소문이 폭탄처럼 올라왔다.’고 하니 이를 지켜보는 스님의 심정이 참담하셨겠습니다. 그런데 왜 유학자들은 스님을 그토록 미워한 걸까요? “나에 대한 것보다도 불교에 대한 미움이 더 컸겠지요. 허나 불교와 유교 사이를 서로 구분해 배척하는 건 편견이고 망상일 뿐이란 걸 모르지요. 공자, 노자, 부처님이 말씀한 근원이 둘이 아님에도 우열을 두어 배척하는 것은 조선 유생들의 정치적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오.”

 

당시 교종판사였던 수진 스님도 주변의 일로 2년도 못돼 중도하차 하셨습니다. 이들의 상소 내용은 서울에 흰 무지개가 떴다느니 함흥에서는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으니 그것이 요망한 스님 때문이라고 하는 치졸한 수준이니까 말해 뭐 합니까. 꼬투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됐었다오.


이 한 몸 바쳐 불교가 일어날 수 있다면 무슨 일이건 감당하겠다는 각오로 뛰어들었지요. 당시 유생들은 없는 것도 만들어 내어 시비를 걸어오는 상황인데 내가 어떤 다른 욕심을 내겠소. 더욱이 임금을 위해 불교 탄압함이 진정한 선비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다만 내가 크게 상심하고 힘든것은 그들 때문보다는 몇몇 스님이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보우가 허물이 있다고 성균관에 가서 얘기하고 거짓 잘못을 만들어 임금께 상소를 올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힘을 모아도 시원찮을 판인데. 그래도 스님께서 불교부흥을 위해 진력하신 후 불교계 내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은데 어땠습니까?

처음에 텅텅 빈 사찰이 많았는데 도승제와 승과제 영향으로 주지가 있는 절이 99개에서 395개로 크게 늘었지요. 그간 침체됐던 교학과 선풍이 구름처럼 일어나 각 사찰에는 승과를 준비하기 위한 경전공부도 대단했다오. 하지만 무엇보다 승과제도로 탁월한 인재들에게 승려로서의 길을 열어줄 수 있었던 점이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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