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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정사 소식

6월 둘째주 일요법회(6/11,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6-11 14:11 조회5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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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둥 번개를 동반한 요란한 비가 오고나니 맑은 하늘에 따가운 햇살이 쏟아 집니다. 변화무상한 요즘 날씨입니다.

오늘은 6월 둘째주 일요법회가 열리는 날이라 신도님들이 하나 둘 올라 오십니다.

 봉은사 교무국장이신 석두스님은 법문에서 심심불이(心心不異) 제법공상(諸法空相)이란 주제로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형식화되고 고정적인 실체가 없으며, 기존의 가치와 권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원래의 하늘에 우리 스스로가 맑다, 흐리다 이름지어 판단한다는 겁니다. 임제스님의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을 일러 주시며 지금 머물고 있는 그 자리에서 주인이 되라고 하시는 말씀을 새기며 법회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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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문하시는 석두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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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도안, ppt 도신수, 발원문 원불성, 집전 도향거사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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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2구 공양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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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피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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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신도 안내 하시는 동명스님과 전법단장 도안거사님 -

 

심심불이(心心不異) 제법공상(諸法空相)

 

봉은사 교무국장 석두스님

 

여하시심심불이처(如何是心心不異處)?

무엇이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는 곳입니까?

 

배우는 학인이 임제스님께 묻고 있습니다. 본래의 마음과 번뇌의 마음이 합일되는 마음은 어느 곳에 있느냐고. 그 합일되는 곳이 마음의 안식처이며, 번뇌가 사라진 참마음의 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만 찾기만 하면 또 그곳에서 그 마음을 쓴다면 모든 괴로움과 번뇌가 다시는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그런 진짜의 참마음이 숨겨져 있는 비밀스러운 곳이 있을까요? 있다면 저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곳을 꼭 찾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이상향은 없습니다.

임제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럼 우리들은 영원히 고해의 바다에서 방황하는 존재가 되어야 할까요?

 

사운(師云) 이의문(爾擬問) 조이료야(早異了也).

임제 왈 네가 헤아려 질문한 그때부터 어긋났다.”

성상각분(性相各分) 막착(莫錯).

성품과 모양이 나뉘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자의 질문부터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십니다. 나쁜 마음과 좋은 마음은 나눌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대상을 실체화하면 본질과 작용을 나누어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자동차는 없습니다. 이 말을 이해한다면 눈 밝은 사람입니다. 자동차라는 실체는 없습니다. 뭇 부속품들의 역할과 작용의 결과가 이동하는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인식되고, 우리는 그것을 다른 이동수단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자동차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입니다.

자동차는 뭇 인연들의 결과로 우리에게 인식되는 인연들의 합일 뿐이지, 본래부터 자동차가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자동차는 다른 것과 별개의 존재로 존재한다는 착각 속에 살며, 그것을 대상화하고 더 좋은 것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을 과시하려 합니다.

그러한 어리석은 욕망의 결과 ‘car poor’족이란 신조어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실존하는 객체를 대상화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좋고 싫은 분별심을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대상화한다는 것은 욕망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대상을 왜곡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입력부터가 잘못되어 들어오게 됩니다. 결과는 당연히 판단오류이겠지요. 아무리 슈퍼컴퓨터의 계산력이 뛰어날지라도 입력값이 잘못되면 오답은 필연인 결과가 될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적절한 질문인 듯 보이지만, 본질적인 안목에서는 질문 자체가 오류입니다. 본질과 작용은 둘이 아닙니다. 본질이 작용이고, 작용이 본질입니다. 작용이 없다면, 본질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본질이 없다면 작용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주먹을 쥐는 것과 주먹을 펴는 것이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하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모양은 다르나 같은 손의 다른 모습일 뿐인데 말입니다.

 

세출세간법(世出世間法) 개무자성(皆無自性) 역무생성(亦無生性).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모두 스스로의 성품도 없고, 생겨난 성품도 없다.

단유공명(但有空名) 명자역공(名字亦空).

단지 빈 명칭뿐이며, 명칭 또한 공한 것이다.

 

중생의 세계나 깨달음의 세계 속에 속하는 모든 것은 인연가합만이 있을 뿐입니다. 관계의 그물 속에서 작용이 드러나고 본질이 드러납니다.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름은 단지 구별을 위한 수단이지 본질은 아닙니다.

그래서 빈 명칭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이름 또한 관계 속에서만 의미와 역할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름에 집착하는 것이나, 본질에 집착하는 것이나 모두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입니다. 중도의 견해가 아닙니다. 중도의 견해는 작용과 본질을 둘로 나누어 보지 않는 안목입니다. 작용이 드러나면 작용으로 이해하고, 본질이 드러나면 본질로 봅니다. 그냥 보는 것이지 자신의 생각을 이입하지 않습니다. 드러난 것은 드러난 것으로, 감추어진 것은 감추어진 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볼 뿐입니다.

마음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현상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그것을 마음이라 이름했을 뿐입니다. 마음을 떠난 또 다른 마음은 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그 이름이 마음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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