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셋째주 일요법회(5/21,일)
본문
부처님 오신날 준비로 도량이 어수선한데 대웅전에서는 셋째주 일요법회가 봉행되었습니다. 봉은사 교무국장 석두스님의 "무엇이 부처이고 무엇이 마구니인가?"라는 법문을 통해 차별없이 바라보면 부처의 마음이고 차별있게 바라보면 마구니 마음이라고 의심지말고 있는 그대로 편견없이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법문 꼭 한번씩 읽어봐 주세요. -()-
- 법문하시는 석두스님 -
- 바라밀 합창단 음성공양 "연등" -
- 발원문 하시는 법공덕 보살님 -
- ppt 여련심, 집전 청여, 사회 덕산 거사님 -
무엇이 부처이고 무엇이 마구니인가?
봉은사 교무국장 석두스님
問 如何是佛魔?
묻기를 “무엇이 부처와 마구니입니까?”
중생들은 무엇이든 분별적으로 대상과 경계를 바라봅니다. 질문자는 중생들의 의식을 대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는 수행의 결과로 얻어질 수 있는 좋은 것이고, 마구니는 깨달음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깨달은 자의 안목으로 본다면 부처가 마구니이고, 마구니가 부처입니다. 경계의 참모습은 하나입니다. 하지만 중생들이 받아들이고 의식하는 경계는 중생들의 수만큼 많을 것입니다. 인연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경계에 대한 시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앎이란 대상과 나와 식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師云 爾一念心 疑處是魔
스승이 말하길 “너의 한 생각과 마음이 의심하는 것이 마구니다.”
중생들이 대상을 바로 알 수 없는 것은 인식기관을 통해서만이 알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모순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식기관은 분별적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대상의 차별적인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일념심’은 분별적 사고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인식의 한계를 말합니다. 중생들은 마음으로 대상을 본다고 하지만 그 마음은 이전의 오염된 인식들이 만들어 놓은 생각의 덫입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하기 때문에 마구니라 한 것입니다. 선악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상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없게 하는 모든 것들은 마구니들입니다.
爾若達得 萬法無生 心如幻化 更無一塵一法 處處淸淨 是佛.
네가 만약 만법은 생함이 없어, 마음은 허깨비와 같음을 통달한다면,
다시 한 티끌 한 법도 없어서 모든 곳이 다 청정하여 그것이 부처이다.
우리들이 바라보는 모든 대상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에 생함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미 내가 만들어 놓은 인식의 세계 속에 그것은 늘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같이 느끼고, 그와 같이 보고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내 세계의 전부이고, 창조된 것도, 만들어진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알 수만 있다면 더러움도 없고 청정한 것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두 다 내가 만든 경계이니 더러움과 깨끗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안목을 갖추었다면 그가 바로 부처의 안목을 가진 이가 됩니다. 노력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안목만 바꾸면 마구니가 부처가 됩니다.
然佛與魔 是染淨二境
그러므로 부처와 마구니는 물들고 깨끗한 두 가지 경계이다.
約山僧見處 無佛無衆生無古無今 得者便得 不歷時節
그러므로 산승의 얻은 바로는 부처도, 중생도, 옛도 지금도 없어서 얻은 자는 바로 얻으니 세월을 보낼 필요가 없다.
無修無證無得無失 一切時中 更無別法 設有一法 過此者 我說如夢如化
山僧所說 皆是道流卽今 目前孤明 歷歷地聽者
수행할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으며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
언제든지 아주 특별한 법이 없다. 설사 이것을 벗어난 법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말한다. 그것은 꿈과 같고 환화와 같은 것이라고.
산승이 말하는 것은 모두 바로 지금 눈앞에서 홀로 알며
역력한 토대에서 듣는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