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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둘째주 일요법회(4/9,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4-09 13:30 조회5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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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둘째주 일요법회가 석두스님(봉은사 교무국장)의 법문으로 4월9일(일) 

60여명의 대중들이 동참한 가운데 여법하게 봉행되었습니다. 

 

"조연에게 속지말라"는 주제 법문을 통해 사념처 수행을 배워갑니다. 

 

비구들이여이 길은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게 하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다 사라지게 하고옳은 방법을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니그것은 곧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

여기서 네 가지 길이란 곧 사념처수행을 말한다.

- 4월 둘째주 일요법회보 중 - 


법회의 원만봉행을 위해 애쓰신 모든분들께 감사와 찬탄의 박수를 올리며  

오늘 법회소식.. 사진으로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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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에게 속지 말자

 

봉은사 교무국장 석두스님

비구들이여,

이 길은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게 하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다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니,

그것은 곧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

 

여기서 네 가지 길이란 곧 사념처수행을 말한다.

 

신념처(身念處)’수행은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말한다.우리의 몸은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존재한다. ‘인간의 육체는 변화의 속성을 갖고 있다. 변하지 않는 몸은 없다. 하지만 중생들은 변해가는 몸을 보며 괴로워한다. 때로는 진실을 외면하거나 혹은 잊은 듯이 행동한다. 우리가 수용하건 수용하지 않건 변해간다는 사실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우리의 몸은 그런 것이다. 머리카락부터 발톱까지 모든 것은 쇠하고 허물어져 간다. 이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사념처 수행의 첫걸음이다.

 

우리들에게 몸은 이 우주에서 유일한 것이다. 그 무엇과도 대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몸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몸은 성품이 공하여 시간적으로 유한하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누구나 다 죽음을 맞이한다. 부처에게도 예외는 없다. 낙담하고 슬퍼할 것인가? 아니면 유한하기에 더욱더 최선을 다해 그 짧음의 슬픔을 최고의 찬란함으로 바꿀 것인가? 각자의 몫일 뿐이다. 그래도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수념처(受念處) 수행느낌에 대한 관찰이다.우리는 느낌에 대하여 고락(苦樂)을 느낀다. ‘느낌의 무상함을 관하는 것이 이 수행의 요체이다. 똑같은 외부적인 자극도 나의 몸 상태와 마음가짐에 따라, 다른 느낌을 형성한다. ‘느낌은 주인공이 아니다. 조연일 뿐이다.

주인공은 그것을 수용하는 나의 마음의 태도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조연이 주인공인 듯 행동한다. 조연의 느낌에 따라 나의 몸도 마음도 모두 끌려 다닌다. ‘수념처 수행은 느낌이 조연임을 확연히 아는 것이다.

조연은 연극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주연은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의 태도이다. ‘느낌의 무상함이 연극의 주제이다. 느낌은 내가 만든다. 외부적 요인은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마음이 이 모든 것의 주인이다. 느낌은 내가 만든다. 그러므로 나만이 바꿀 수 있다. 외부에서는 결코 바꿀 수 없다.

 

심념처(心念處)수행마음의 무상성에 대한 관찰이다.우리는 각자의 마음이 견고하다고 착각한다. 마음은 결코 견고하지도 단단하지도 않다. 변덕쟁이라고 보면 된다. 왜냐하면 이 마음 또한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연생, 인연멸’, 마음의 속성은 그때, 그때 달라요이다. 그렇지만 그 끊임없이 변화하는 마음을 보는 다른 마음이 있다. 변화하는 마음을 보는 놈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기쁨도 슬픔도 떠난 자리를 알게 된다.

그 자리가 비로소 부처의 자리요, 참 마음의 자리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두번 다시는 속지 않는다. 태어남도 죽음도 모두가 꿈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늙음 속에서 늙지 않는 법을 알게 되고, 죽음 속에서 죽지 않는 법을 알게 된다. 부처의 법이 그러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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