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호법법회(2/1,수)
본문
2월 호법법회가 적은 인원의 참여로 대웅전에서 스님들의 인례로 봉행되었습니다.
벽암 지홍스님은 " 세조대왕과 석보상절" 에 대한 법문을 통해 세종대왕이 죽은 소현왕비를 위하여 아들 수양대군을 시켜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와 설법을 담아 한글로 편찬한 최초의 불교경전인 석보상절을 만들게 한게 부처님법을 받들어 호지하는 호법정신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수양대군은 훗날 세조왕이 된겁니다. 석보상절을 읽어보고 화답한시가 유명한 "월인천강지곡"이라고 부처님 공덕을 칭송한 최초의 찬불가라 합니다. 잊혀져가던 역사의 한면을 다시 떠 오르게 하는 귀한 법문이었습니다. 우리도 각자 맡은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것과 법회에 참석하는것도 호법일거라 믿습니다. 우리모두다 호법 합시다. _()_ -마하반야바라밀 -
세조대왕과 석보상절[釋譜詳節]
벽암 지홍스님
세조대왕은 世宗대왕의 둘째아들로써 수양대군이다. 그가 王子시절 우리나라 최초로 불경[석보상절 24권]을 번역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읽게 하였다. 그 당시는 선비나 학자 특수계층에서나 한문으로 된 불경을 읽을 수 있었기에 보통 사람들로서는 부처님의 경전을 읽을 수 없어 그림에 떡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수양대군이 아버지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서기1447년 세종29년]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 팔상성도를 간결하게 만든 다음 그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여 석보상절이라고 한 것을 세종대왕이 직접 讚頌을지어 月印千江之曲이라 하였다. 석보상절은 부처님 일생의 수행과 행적인 팔상성도를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한 최초의 한글 경전이다.
월인천강지곡은 수양대군이 펴낸 석보상절에다 세종대왕께서 찬송을 지어 월인천강지곡이라 하였으나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뒤 4년이 되던 해 다시 뺄 것은 빼고 첨가할 것은 해서 다듬고 간추려서 월인천강지곡을 완성하였으니 그것이 전무후무한 불후의 명작인 오페라 곡 중의 오페라곡이다.
불교가 고려 때는 계속 흥하여 역대 왕들마다 고승을 왕사 국사로 받들며 불교신봉을 하여왔으나 조선조 초기부터는 유생들에 의해 침체기에 들어서게 되었지만 그러나 세종과 세조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세조가 불교에 귀의하게 된 동기는 자신의 형인 문종의 아들 [조카] 단종을 폐위시켜 내쫒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충신들의 거센 반발을 받았다.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李塏]는 단종의 복위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온몸이 찢어지고 터져서 피투성이가 된 체 소달구지를 타고 사형장인 옹산의 새남터로 끌려가는데 이때가 세조즉위 2년6월이니 한 여름에 얼마나 무더웠을까? 이개는 “까마귀 눈비마자 희는 듯 검 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 우리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 있으랴.”
성삼문은 “북소리가 이 목숨을 재촉하는데 뒤 돌아보니 지는 해는 석양을 넘고 저승길 가는 길에 주막도 없을 터인즉 오늘밤은 뉘 집 찾아 쉬어서 갈거나.” 죽음의 사지로 끌려가면서도 두려움이나 후회함이 없이 자신들이 섬기던 임금에 대한 충성에 변함이 없음을 노래 부르며 떠났다.
또 梅月堂 金時習은 8개월 만에 한글을 깨우쳤고 3살 때 사서삼경을 통달한 당대의 최고 학자요 선비 얻는데 북한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쫒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나라의 꼴이 이 모양인데 공부를 하면 무엇에 쓰겠는가.”하고 붓을 꺾어 버리고 충남 부여군 외산면 무량사에 입산하여 스님이 되었다. 그러나 후진을 위하여 잠시 퇴속을 하였다가 다시 금오산에 들어가 수행을 하면서 최초로 한문 금오신화를 쓰는 등 수행을 하다가 말년에 본래入山寺인 무량사로 다시 가서 여생을 마치고 열반에 들었다. 이개나 김시습뿐만 아니라 세조왕의 등극으로 인하여 성삼문 등을 위시하여 많은 충신들과 절계 궂은 선비들이 희생과 피 흘리는 참극이 많았다. 그러나 단종의 복위를 노리는 신하들의 등살로 단종은 결국 강원도 영월 땅으로 유배를 가있던 단종은 노상군으로 강등되었다가 또다시 평민이 된 뒤 사약을 받아 죽고 말았다.
그 뒤 세조는 인과응보로 그토록 사랑하던 큰 아들이 죽게 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조카를 죽인 과보다”라는 말을 들을까봐 무한히 괴로워하였다. 자신의 아들이 죽자 슬픈 충격도 있었지만 조카를 죽이고 많은 신하를 처형하여 참혹한 인과를 씻기 위해서 부처님을 찾아 불문에 귀의하면서 속리산의 법주사 서울 낙원동 원각사 대 탑을 보수하는가 하면 강산의 많은 사찰을 중수하게 되었고. 말년에는 몸에 모진 피부병을 얻어 고생을 하던 중 오대산 상원사 참배를 갔다가 계곡에서 목욕을 하는데 가려운 곳에까지 손이 닿질 않아 답답해하던 중 문수동자를 만나 보살의 가피로 고통스러워하던 피부병을 고치게 되었다.
세조대왕이 문수보살을 친견하게 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세조와 문수동자의 설화는 세조가 화엄사상에 심취 하였다는 뜻이다. 문수동자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선재동자가 53善知識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문수보현을 만나 十大願을 듣고 아미타 佛國土에 왕생하여 入法界의 志願을 성취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어찌 보면 세조왕은 보현보살의 화신일 수도 있다는 분들이 많다. 한나라의 임금이 되려면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십지보살의 행원을 닦고 지위를 얻어야 된다.
더욱 불교를 접하기 어려운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깊은 진리를 알 수 있게 한글로 석보상절이란 불경을 펴내고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는가 하면 금강경을 우리말로 펴내는 등 누구도 할 수 없는 큰 업적을 이룩한 중국의 양무제와 더불어 보살황재였고 이 세상에 누구나 자신이 지은 업보는 반드시 받게 된다고 하는 인과응보의 진리를 몸소 실천해보인 현세의 화신보살이 세조대왕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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