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둘째주 일요법회 및 음력11월 지장재일(12/11.일)
본문
12월 둘째주 일요법회날이 마침 음력 11월 지장재일(11.18)과 겹치는 날입니다.
스님 네분과 근래에 보기 드물게 법당 가득 메운 신도님들과 함께
우렁찬 목소리로 법회가 봉행됩니다.
천수경-상단불공-정근 및 축원-반야심경에 이어 봉은사 포교국장 석두스님의 법문, 발원문 낭독후 관음시식으로 긴 시간동안 자리 미동도 없이 조상천도를 위한 마음들이 모여
법당이 후끈 달아 오릅니다.
오늘 법회를 위해 애쓰신 봉사자분들을 비롯해 모든분들...고생 많으셨습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진리의 수호와 인식 그리고 성취의 문제에 대한 부처님 말씀
봉은사 포교국장 석두스님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신들만의 진리를 말합니다.
그 진리를 따르고 행하는 자만이 궁극적인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종교적인 진리의 모습은 종교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많아서 무엇이 진정한 진리의 참모습인지 보통의 사람은 혼란스러울 것 입니다.
지금도 그랬고 과거에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무엇이 진정한 진리인가에 대한 물음이 끊임없이 있어왔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올바른 방향을 향해 있어야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는 유행하시다가 코살국의 오빠사다라는 바라문 마을에 도착하셨을 때에 한 바라문 청년의 질문과 대답 속에서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바라문 청년은 세존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 고타마 존자여, 바라문은 오래 전승되어 온 베다의 말씀에 의지하여 진리를 분별합니다. 이것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바라드와자여, 그렇다면 바라문 가운데 누구든 ‘내가 그것을 안다. 내가 그것을 보았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이야기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세존께서는 이어서 과거의 바라문 스승 가운데에서도 이를 본 자가 있는지?
또는 최초에 이 베다를 만든 사람들이 안다, 보았다, 이것만이 진실이다라고 말한 자가 있는지에 대해서 물으십니다.
“바라드와자여, 그와 같다면 맨 앞사람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사람도 보지 못하고, 맨 뒷사람도 보지 못하는 장님들이 고집스럽게 줄지어 서 있는 장님들의 줄서기 같은 것이라오. 이와 같이 바라문들의 신념은 근거가 없지 않나요?”
세존께서는 개인적인 신념이 진리의 판단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친절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개인의 가치관은 그 개인의 삶 전체를 조망해 볼 수 있는 로드맵과 같은 것입니다. 삶의 지향점이 개인마다 다른 만큼 각 개인의 삶의 모습도 다양하게 펼쳐 질 것입니다. 모두 존중되어야 할 각자의 삶의 모습일 뿐, 진리에 부합되는 삶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도중에 많은 고뇌와 번민이 있겠지만 삶은 각자의 업연일 뿐입니다. 문제는 올바른 신념에 의하지 않은 삶은 많은 괴로움이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바라문 청년은 다시 생각해 보고 대답합니다.
“이 경우에 바라문들은 결코 신념 때문에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 때문에 숭배합니다.”
“그대는 이전에는 신념을 따르더니, 이제는 전통을 이야기하는군요. 지금 두 가지 결과가 있는 다섯 가지 법이 있다오, 그 다섯 가지는 어떤 것인가?
신념, 기호, 전통, 논리적인 추론, 사변적 견해의 이해와 승인,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것이 진리의 수호라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진리의 수로를 언명(言明)한다오. 그렇지만 그때 진리의 인식(認識)이 있는 것은 아니라오.“
“진리의 인식이란 어떤 것입니까?”
“비구가 어떤 마을이나 도시에 의지하여 살아가면, 거사나 거사의 아들이 그에게 와서 탐(貪), 진(嗔), 치(癡), 세 가지 행실에 대하여 살펴본다오.
이 존자의 마음이 탐,진,치에 사로잡혀서, 알지 못하면서 ‘나는 안다’라고 말하거나, 보지 못하면서 ‘나는 본다’라고 말하여, 다른 사람이 오랜 시간 무익한 괴로움을 겪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이 그를 살펴보고 나서, ‘이 존자는 그렇지 않다. 이 존자는 탐,진,치가 없는 사람으로서 몸가짐이 바른 사람이고, 언행이 바른 사람이다.
탐,진,치가 없이 청정하다고 여김으로써, 이제 그에게 믿음을 일으킨다오.
믿음이 생기기 때문에 찾아가서 공경하고, 공경하기 때문에 귀를 기울인다오.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가르침을 기억하고,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확인한다오.
의미를 확인함으로써 가르침을 이해하고 승인하고, 가르침에 대한 이해와 승인이 있을 때 의욕이 생긴다오.
의욕이 생기면 시도하고, 시도해본 후에 비교하고, 비교해본 후에 정근하고, 정근하면서 몸으로 최고의 진리를 체험한다오. 그리고 그것을 통찰지(般若)로 통찰하여 본다오. 진리는 이런 방식으로 인식한다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진리의 인식을 언명한다오. 그렇다고 그때 진리의 성취(成就)가 있는 것은 아니라오.”
“존자이시여, 진리의 성취란 어떤 것입니까?”
“그 가르침을 반복하여 닦아 익혀서 실천하는 것이 진리의 성취라오. 진리는 이런 방식으로 성취한다오.”
“그렇다면 진리의 성취에 도움이 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정근(精勤)이 진리의 성취에 도움이 된다오.”
“정근에 도움이 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비교(比較)가 정근에 도움이 된다오. 비교해보지 않으면 정근할 수 없다오.”
“비교에 도움이 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시도(試圖)가 비교에 도움이 된다오.”
“시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의욕이 시도에 도움이 된다오.”
“......” “가르침의 이해와 승인이 도움이 된다오. 가르침을 이해하여 승인하지 않으면 의욕이 생길 수가 없다오.”
“......” “의미의 확인(確認)이 가르침의 이해와 승인에 도움이 된다오. 의미를 확인하기 때문에 가르침을 이해하여 승인할 수 있다오.”
“......” “가르침의 기억이 의미의 확인에 도움이 된다오.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으면 의미를 확인할 수 없다오.”
“......” “가르침의 청문(聽聞)이 가르침의 기억에 도움이 된다오. 가르침을 듣지 않으면 가르침을 기억할 수 없다오.”
“.....”“경청(傾聽)이 가르침의 청문에 도움이 된다오. 경청하지 않으면 가르침을 들을 수 없다오.”
“.....”“공경(恭敬)이 경청에 도움이 된다오. 공경하지 않으면 경청할 수 없다오.”
“.....”“방문이 공경에 도움이 된다오. 방문하지 않으면 공경할 수 없다오.”
“.....”“신뢰가 방문에 도움이 된다오. 신뢰가 생기지 않으면 방문하지 않는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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