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셋째주 일요법회(11/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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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셋째주 일요법회가 11월20일(일) 동명스님의 "알아차림은 행복을 보장해줍니다."라는
주제법문으로 50여명의 대중들이 동참한 가운데 여법하게 봉행되었습니다.
예불의식에 이어 광덕스님의 보현행자의 서원 "회향분"을 다함께 합송한후
동명스님의 법문으로 이어집니다.
알아차림의 혜택 7가지를 새겨봅니다. _법회보 중
첫째, 우리의 경험을 깊이 있게 만들어줍니다.
둘째, 자신의 고통을 덜게 됩니다.
셋째, 남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게 됩니다.
넷째, 알아차림은 사물과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줍니다.
다섯째, 알아차림은 선정으로 인도합니다.
여섯째, 알아차림은 이해와 수용,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일곱째, 알아차림은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킵니다.
법회의 원만봉행을 위해 수고해 주신 모든분들께 감사와 찬탄의 박수를 올리며
오늘 법회현장모습... 사진으로 함께하세요.~~~~
-바라밀합창단 일요법회 음성공양은 매월 첫째주, 셋째주 일요법회일니다..^^-
- 오늘 점심공양 봉사는 보현구에서 담당해 주셨습니다...^^-
가피봉사는 문수2구 법우님들께서...^^
알아차림은 행복을 보장해줍니다
팔정도의 일곱 번째 ‘정념(正念)’
금강정사 총무 동명스님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지 않고/ 백 년을 사느니/ 단 하루라도/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며 사는 것이 더욱 값지다. (법구경 113송)
팔정도의 일곱 번째는 ‘바른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이란 바로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꿰뚫어서 인지하는 것입니다. ‘바른 알아차림’은 팔정도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실천원리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알아차림이 되었을 때 바른 견해를 확립할 수 있고, 바른 사유를 할 수 있고, 바른 말을 하지 않으려는 자신을 제어할 수 있으며, 바른 행위를 할 수 있고, 바른 생계활동을 할 수 있으며, 바른 노력, 바른 집중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이 팔정도의 바탕이라면, 당연히 사성제의 바탕이기도 합니다. 먼저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알아차리는 것,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고성제입니다. 그 현실의 원인을 알아차리는 것이 집성제이며, 현실을 극복하여 행복해질 수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멸성제입니다. 그리고 도성제의 기본적인 실천원리가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알아차림의 대상을 네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몸, 느낌, 마음, 법(法)이 바로 그것입니다.
“비구들이여, 유일한 도인 이 길은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디가니까야 대념처경)
우리들이 가장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몸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몸이 움직이는 모습, 걷거나 이동하거나 머무르거나 앉아 있거나 눕는 모든 행위를 인지하는 것, 그리고 아프거나 가렵거나 불편하거나 따가운 몸의 상태를 분명하게 인지하는 것이 몸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을 알아차리는 것부터 실천하다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습관을 갖게 됩니다.
남편과 두 아이를 잃은 여인 빠따짜라는 부처님을 만나 출가하여,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한 후 부처님의 게송(113송)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알아차림은 우리에게 참으로 다양한 혜택을 줍니다.
첫째, 우리의 경험을 깊이 있게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많은 경험을 하지만, 대부분 별 의미 없이 지나칩니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 하늘을 보셨습니까?”라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이 “보긴 봤을 텐데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바로 자신이 본 것을 알아차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순간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만큼 깊고 풍부한 경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고통을 덜게 됩니다. 고통스러울 때 그 고통을 잘 들여다보십시오. 오온이 실체가 없는 것이듯이 고통도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철저히 하게 되면 고통의 실체 없음을 깨닫게 되고 자연스럽게 고통을 덜게 됩니다.
셋째, 남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게 됩니다. 알아차림은 남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고, 그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합니다. 알아차림 수행을 통해 나와 남이 연결되어 존재함을 알게 되고, 나의 고통은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되며, 이를 통해 남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넷째, 알아차림은 사물과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줍니다. 그 능력이 바로 지혜입니다. 알아차림을 통해 연기와 중도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알아차림을 통해 바른 견해를 확립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알아차림은 선정으로 인도합니다.
여섯째, 알아차림은 이해와 수용,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일곱째, 알아차림은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킵니다.
틱낫한 스님은 말씀하십니다. “알아차림은 시간을 따로 낼 필요가 없습니다. 운전하거나 식사하거나 설거지할 때 모든 순간 지금 하는 일과 놀이에 집중한다면 알아차림은 가능합니다. 그 순간 모든 노동과 행위가 수행이 됩니다.”
바른 알아차림을 수행하면 우리 안팎에 있는 불성의 힘을 발현시킬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세상을 구할 수 있는 힘입니다. 부처는 온종일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다만 이따금씩 부처가 될 뿐입니다. ‘부처의 눈’을 통해 보고 ‘부처의 귀’를 통해 듣게 되면, 의사소통이 원활해질 수 있고 많은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의 힘을 손에 모으면, 부처님의 손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마음에 욕심이 있는 사람은 차가운 연못에서도 물이 끓고 산과 숲 속에서도 요란하며, 마음이 비어 있는 사람은 폭염 속에서도 서늘함이 생기고 도심이나 장터에서도 시끄러움으로부터 자유롭다.”(만해스님의 채근담에서)
홀로 앉아 마음 바다 들여다보니 / 망망한 물결이 하늘까지 닿았네.
뜬구름은 일어나지도 멸하지도 않는데 / 외로운 달만 삼천세계 비추는구나.
獨坐觀心海 茫茫水接天 浮雲無起滅 孤月照三千
- 괄허취여(括虛取如, 1720~1789), 마음을 관하다(觀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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