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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정사 소식

11월 둘째주 일요법회(11.13/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2-11-13 13:34 조회6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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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오던 비가 그치고 잔뜩 찌푸린 하늘이 기온이 쌀쌀해져옴을 느끼게 합니다.

평소보다 적은 숫자의 대중과 함께 둘째주 일요법회가 봉행되었습니다. 석두 스님의 법문중 "법에 대한 안목을 키우는게 깨달음이다"라는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건  나 스스로도 바른 정견을 하려고 노력하는 터라 제대로 바라볼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이 더욱더 공감 되었습니다. 지공화상의  불이송의 14가지 가르침을 되세기며

바라밀 카페 13년을 지킴이 해오신 여연거사님께 축하의 마음전달인 꽃다발 전달식을 끝으로  오늘법회가 풍성하게 마무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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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 예경하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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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행원 "수순분" 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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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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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문하시는 석두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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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문듣는 대중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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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연거사님께 감사의 꽃다발 건네시는 동욱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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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년간 바라밀카페지기 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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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공화상의 불이송(不二頌)

 

 봉은사 포교국장 석두스님


1. 보리번뇌불이(菩提煩惱不二) 보리와 번뇌가 둘이 아니다

2. 지범불이(持犯不二) 지키고 어김이 둘이 아니다.

3. 불여중생불이(佛與衆生不二)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

4. 사리불이(事理不二) 사실과 이치가 둘이 아니다.

5. 정란불이(靜亂不二)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둘이 아니다.

6. 선악불이(善惡不二) 선과 악이 둘이 아니다.

7. 색공불이(色空不二) 색과 공이 둘이 아니다.

8. 생사불이(生死不二)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

9. 단제불이(斷除불이) 끊음과 이어짐이 둘이 아니다.

10. 진속불이(眞俗不二) 진제와 세속이 둘이 아니다.

11. 해박불이(解縛不二) 풀리고 묶임이 둘이 아니다.

12. 경조불이(境照不二) 경계와 비춤이 둘이 아니다.

13. 운용무애(運用無礙) 부리고 씀에 막힘이 없다.

14. 미오불이(迷悟不二)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다.

 

중생들은 도 닦을 줄 모르나니 곧 번뇌를 끊어 없애고자 한다.
번뇌는 본래 텅 비고 고요하니 도를 가지고 다시 도를 찾으려 한다.
한 생각 이 마음이 바로 이것인데 어찌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하는가?
큰 도는 눈앞에 밝게 드러나 있건만 미혹하고 어리석은 중생은 알지를 못하는구나.
불성은 천진하고 저절로 그러하니, 인연도 없고 닦아서 만들 것도 없다.
탐진치 삼독이 헛된 가짜임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집착하여 생노병사를 따라 떠다닌다.
옛날 어리석을 적에는 늦은 것 아니냐 하였는데, 오늘 비로소 깨달으니 빠름도 아니로다.
대장부는 움직이고 씀에 막힘이 없으니, 계율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
계율을 지키고 어김이 본래 생겨남이 없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 규칙에 묶이는구나.
지혜로운 자에게는 조작함이 모두 공이지만, 성문(聲聞)은 부딛히는 족족 막히는구나.
선사는 육안으로도 두루 통하지 않음이 없지만, 이승(二乘)은 천안으로도 막혀서 보지 못하네.
공한 가운데에 망령되이 ‘있음’과 ‘없음’에 집착하여, 형상과 마음이 걸림없는 줄을 알지 못하네. 보살은 속인과 살아도, 청정하여 세속에 물든 적이 없네.
어리석은 사람은 열반을 탐하고 집착하지만, 지혜로운 자에게는 생사(세속)가 곧 실제(무생)이다. 법성은 텅 비어 말이 없고, 인연으로 일어나는 경계에는 사람이 없다.
백 살을 먹어도 지혜가 없으면 어린아이이고, 어린아이라도 지혜가 있으면 백세 노인과 다를 바 없다.
중생과 부처는 다름이 없으며, 큰 지혜는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네.
어찌하여 밖에서 보물을 찾으려 하는가?
자신 속에 본래 밝은 보배구슬이 있다네.
바른 길과 삿된 길은 둘이 아니고, 범부와 성인이 같은 길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미혹과 깨달음이 본래 차별이 없고, 열반과 생사가 같구나.
구경에는 인연에 얽매임마저 공적한데, 오직 의식과 생각이 깨끗하고 텅 비기를 구하네.
한 법도 얻을 수 없으니, 고요히 무여의 경지에 절로 들어가도다.
마음은 자재롭고 고요하며, 법성에도 본래 열 가지 묶임이 없다.
모든 것은 본래 불사 아님이 없는데, 어찌 생각을 거두어 좌선해야만 하겠는가?
망령된 생각은 본래 텅 비고 고요하니, 인연에 얽매임을 끊어 물리칠 필요가 없다.
지혜로운 자에게는 얻을 마음이 없으니, 저절로 다툼도 없고 떠들지도 않는다.
힘이 없는 대도를 알지 못하니, 어느 때에 그윽한 진리 깨달을 수 있을까?
부처와 중생이 같은 씨앗이니, 중생이 곧 세존이다.
범부는 망령되이 분별을 내어, 없음 속에 있음을 붙잡고 어지러이 헤매네.
탐진치 삼독이 텅 비고 고요함을 분명히 알면, 어느 곳인들 진리의 문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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