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두스님의 수행법문 _ 5월 둘째주 일요법회(5/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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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둘째주 일요법회가 5월10일(일) 석두스님 법문으로 여법하게 봉행되었습니다.
법문에 앞서 보현행자의 서원 제10분 수순분을 합송합니다.
"중생을 수순함은 모든 부처님을 수순함이 되며, 중생을 존중히 받들어 섬기면
여래는 존중히 받들어 섬김이 되며,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심이 나게 하면
여래로 하여금 환희하시게 함이오니, 저희들은 모든 중생에게 부처님을 대하듯
공경하고 받들어 섬기겠습니다." _수순분 中
오늘 석두스님의 법문주제는 "순간의 생각이 미래의 생각을 좌우한다"입니다.
법문 동영상은 금강정사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하실수 있습니다.
법문이후 어버이날 행사일환으로 진행된 선물전달은 대각 조응식 신도회장님께서
신도님들께 가족의 소중함과 건강한 신행생활을 기원하며 열분의 신도님들께
카네이션 화분과 손수건을 선물로 전달하였습니다.
오늘 사회는 도안거사님, 집전은 법등거사님, ppt는 여래향, 묘지행 보살님,
발원문 낭독은 신도님들을 대표해서 관음구 보원보살님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문수2구(명등 지승)에선 맛난 점심공양으로 국수공양으로 준비해 주셨습니다.
법회후엔 향산스님을 모시고 배식창구 담당자회의가 진행되어
4개 구법회(문수1구, 문수2구, 보현구, 관음구)가 부처님오신날 당일 수고해 주실 예정입니다.
한편으로 향연수 보살님께서 보시해 주신 열무로 법회후에도 공양실에선 열무다듬기 운력이 이어집니다.
일요일은 이렇게 함께합니다.~~~
함께해 주신 모든분들께 감사와 찬탄의 박수를 올립니다... ^^










순간의 생각이 미래의 생각을 좌우한다.
석두스님
不二皆同(불이개동)이니 無不包容(무불포용)하니라
‘둘이 아니고 모두 같다면, 포용하지 못할 것이 없음이라.’
시방지자(十方智者)가 皆入此宗(개입차종)이니라
‘온 세상 지혜로운 모든 이들이 이러한 근본 취지에 들어오게 된다.’
宗非促延(종비촉연)니 一念萬年(일년만념)이니라
‘그 근본적 취지에서는 재촉과 지연이 없나니 한 생각이 곧 만 년이니라’
無在不在(무재부재)니 十方目前(십방목전)이니라
‘있음도 있지않음도 없으니 온 세상이 목전에 있음이니라.’
極小同大(극소동대)하니 妄緣境界(망연경계)이니라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으니 더 이상 바깥의 경계는 모두 끊어짐이라.’
개인적 고통의 근본 원인과 집단적 고통의 발생 근원을 면밀히 살펴보면 대상을 차별심을 가지고 판단하고 다르게 대하려는 태도와 생각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개별적인 존재는 생태적으로 다릅니다. 결코 두 몸이 한 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백인과 흑인은 종족적 분류에 있어서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투표권을 제한하는 것은 결국 인종적 차별로 인해 사회적 통합을 방해하고 분열을 야기시켜 사회적 비용과 고통을 낳고 증가시키게 마련입니다. 둘로 나누려는 차별적 시각이 사회적 고통으로 발전하는 전형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870년 남북전쟁 이후 수정헌법 제 15조에 의해 인종과 상관없는 투표권이 명시 되었으나, 보통 선거권이 차별없이 실행된 것은 1965년 린든 존슨 대통령 재임 시절이니,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에서야 비로소 흑인의 보통 선거권이 평등하게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그 동안 미국사회는 흑인들의 민권운동과 참정권 요구시위, 백인들의 조직적인 투표방해 운동으로 혼란과 분열로 인해 고통을 분담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둘로 보지 말고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지혜를 발휘했다면, 그러한 분열로 인한 사회적 분열과 비용을 치루지 않을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한 생각은 지금 지금 현재 발생한 사건이며, 만년은 과거나 미래의 긴 시간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한 생각들이 모여 만년의 시간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따로, 만년의 시간들이 별개가 아닙니다.
한 생각 없이는 만년의 시간들도 없습니다. 한 생각의 인연이 만년을 구성하는 것이니 일념은 만년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인연지은 생각들은 미래의 생각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현재의 한 생각을 잘 지어야 합니다. 지금 생각이 만년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년의 긴 호흡으로 보았을 때 조금의 늦고 빠름은 아주 찰나적인 순간일 뿐입니다. 그 긴 시간 속에서 보면 우리 현재의 삶의 모습은 너무도 순간적인 현상이며, 스쳐 지나가는 영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의 방향이 만년을 지배할 수도 있으니, 순간을 만년처럼, 만년을 순간으로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는 찰나적 존재이며 동시에 무한의 존재입니다. 있고 없음은 현존하는 존재의 유무를 기준으로 합니다.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지구는 찰나적으로 존재합니다. 지구의 시간으로 보면 인간의 존재는 찰나적 사건일 뿐입니다. 하루살이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비교한다면 찰나적입니다.
그러면 찰나와 무한은 무엇을 기준점으로 삼아야 할까요?
현재하는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는 찰나적으로 살아가지만, 동시에 무한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현재 없는 미래의 시간은 없으며, 미래는 모두 현재의 시간을 기반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지금에 충실한 것이 미래의 시간에 충실한 것입니다. 별도로 미래의 어떤 시기를 상정하여 기대하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지혜로운 이는 현재를 살면서 동시에 미래를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말입니다.
반대로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큰 것, 작은 것은 서로 의존적으로 존재합니다. 홀로 큰 것도, 홀로 작은 것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작은 것이 오면 작은 인연에 충실하고, 큰 것이 오면 큰 인연에 충실하니, 별도로 바라는 바가 없게 됩니다.
바라는 바가 없으니, 외부의 인연에 끄달리지 않게 됩니다.
크다는 생각도, 작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주어진 인연에 충실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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