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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둘째주 일요법회(9/12,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1-09-12 14:32 조회3,1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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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산들 바람이 살짝 앉았다가는 저만치 뛰어가고 상크름한 햇살이 뒤따라 다니는 9월의 아침, 금강정사 둘째주 일요법회가 석두스님을 모시고 봉행되었습니다.

코로나19 극복과 치유를 위한 기도정진 일환으로 보배경을 합송하는 시간에 이어, “入道修行綱要門(입도수행강요문)”이라는 주제로 절에 와서 하는 공부에 대하여 스님께서 법문하셨습니다.

사회에 환희지 보살님, 집전 원경거사님, ppt 반야향 보살님, 발원문 낭독에 진성심 보살님이었습니다.

석두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절에와서 해야 하는 공부에 대한 좋은 말씀을 놓치신 분들은 유튜브로 꼭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석두스님의 유튜브 동영상 법문 : https://youtu.be/zfao_JlUJ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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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두스님의 법문이 있는 둘째주 일요법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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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처님께 예경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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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극한 마음으로 두손모아 예경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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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정 : 법문에 앞서 마음을 고요히 하는 명상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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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을 모아 함께 기원하는 발원문 낭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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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처님께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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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入道修行綱要門(입도수행강요문)


봉은사 포교국장 석두스님

 


 

대체로 도에 들어가는 길이 많지만, 요약해 말하면 두 가지 종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로 이치로 들어가는 것이요, 둘째는 수행으로써 들어가는 것이다.

  

 

이입(理入)은 가르침을 빌어서 종지를 깨닫는 것이다. 중생이 똑같은 하나의 진성임을 굳게 믿지만 단지 객진 번뇌의 망상에 덮여서 분명히 나타나지 않으니, 만약 망상을 버리고 진성에 돌아가려거든 마음을 집중하여 벽관(壁觀)하라.
나도 없고 너도 없어 범부와 성인이 평등하게 된다.
견고하게 머물러 움직이지 않아서 다시는 문자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이치와 더불어 그윽하게 부합하여 분별이 없고 절대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이입이라 한다.

 

       

행입(行入)이란 것은 네 가지 수행을 말하는데, 그 나머지 여러 수행은 다 이 네 가지 수행 가운데 들어간다.
이른바 네 가지 행이 있는데,  첫째는 보원행(報怨行)이요,  둘째는 수연행(隨緣行)이며, 셋째는 무소구행(無所求行)이고, 넷째는 칭법행(稱法行)이다.

 

 

첫째, 어떤 것을 처음의 보원행이라고 말하는가? 수행하는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에 마땅히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되, 나는 아주 옛날의 무수겁 중에서부터 근본을 버리고 말을 따르면서 여러 현상으로 흘러 다녔다.  많은 원한과 증오를 일으켜 해친 것이 한량이 없다.
비록 지금 범한 일은 없으나 나의 속세의 재앙이며 악업의 과보가 성숙된 것이다. 하늘도 다른 사람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받는 것을 참아야 하며 모두 원수가 없음이라.
경전에 이르되 “고통을 만나도 근심할 것이 없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심식으로써 통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이 생겨날 때에 이치와 서로 상응하여 원한을 체득하여 도에 나아감이니, 그러므로 원한을 갚는 수행이라고 말한 것이요.

 

 

둘째, 수연행이란 것은 중생에게는 본래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업에 따라 윤회하면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가지런히 받는다.  이 모두 인연을 따라 생겨남이라.
만약 수승한 과보와 명예 등의 일을 받는다고 해도 이것은 내가 과거 속세의 인연이 감응된 것일 뿐이라. 지금 그것을 받는다지만 인연이란 속세의 인연이 다하면 과보는 없는 것이니 어찌 기뻐할 것이 있겠는가?
이익과 손해는 인연에 따르지만 마음은 증가함이나 감소함이 없으며 기뻐하는 것에도 동요하지 않고 그윽하게 도에 따른다. 그러므로 인연을 따르는 수연행이라고 말한다.

 

 

셋째, 무소구행이란 것은 세간의 중생들이 오래도록 미혹하여 곳곳에서 탐착하여 명리를 구함이니 지혜로운 사람은 진리를 깨달아서 세속에 처해서도 마음을 돌이켜(反心) 마음을 편안히 하여 조작이 없고 형상의 인연을 따라 변화하며 만유가 공성이므로 바라고 즐기는 것이 없다. 공덕과 흑암이 항상 따라다니므로 삼계에 오래 머무는 것은 오히려 불난 집과 같다
몸이 있는 것이 모두 괴로움인데 어느 누가 편하리오. 이러한 이치를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에 모든 현상에서 망상이 그쳐 구하는 바가 없다.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구함이 있는 것은 모두 괴로움이요, 구함이 없는 것은 곧 즐거움이다”이라 하시니 판단하되 구함이 없는 것이 진실로 도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넷째, 칭법행이라는 것은 성품이 청정한 이치를 지목하여 법이라고 말하니 이 이치는 모든 형상이 공하여 오염되거나 탐착함이 없으며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느니라. 경전에서 말씀하시되, “법에는 중생도 없으니 중생의 허물을 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실체(我)가 없으니 나(我)라는 허물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지혜로운 자가 만약 이 이치를 믿어서 이해할 수 있다면 법에 걸맞는 수행이라고 말한다. 법체는 간탐이 없다. 몸과 생명과 재물로써 보시를 하여 베풀되 마음에 아깝고 애석한 것이 없으며 삼공(三空)에 요달하여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다만 허물을 버리기 위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며, 상에 걸리지 않으니, 이것은 자신도 이롭고 또한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역시 깨달음의 도를 장엄하는 것이다.
망상을 제거하기 위하여 육바라밀 수행을 하지만 행한다는 집착도 없으니 이것이 법에 부합하는 수행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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