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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둘째주 일요법회(6/13,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1-06-13 13:44 조회4,5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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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부터 한여름의 열기를 있는 힘껏 쏟아내는 푸르른 6월의 아침, 금강정사 둘째주 일요법회가 석두스님을 모시고 봉행되었습니다.

코로나19 극복과 치유를 위한 기도정진 일환으로 부처님 말씀을 다함께 보배경을 합송하는 시간에 이어, “달마의 법이 혜능에게로 가다라는 주제로 스님께서 법문하셨습니다.

사회에 도향거사님, 집전 원경거사님, ppt 원불성 보살님, 발원문 낭독에 여련향 보살님이었습니다.

오늘 법회에 참석하시지 못해 석두스님의 좋은 말씀을 놓치신 분들은 유튜브로 꼭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석두스님의 유튜브 동영상 법문 : https://youtu.be/2FXgQC1s2Q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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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두스님의 법문이 있는 둘째주 일요법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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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 19 극복과 치유를 위해 다함께 합송하는 보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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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처님께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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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두스님의 법문 : 달마의 법이 혜능에게로 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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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의 법이 혜능에게로 가다

 

봉은사 포교국장 석두스님

 

 

 당(唐)나라 때 사람 혜능(慧能)은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출가하여 선종(禪宗)의 제5대조인 홍인(弘忍)을 찾아가 절에서 궂은일을 하면서 불도를 닦았다.  홍인은 혜능의 자질을 알아보고 의발(衣鉢)을 전해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좌인 신수(神秀)를 제쳐 놓고 불목하니나 다름없는 혜능에게 의발을 전하였다가는 다른 승려들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홍인대사는 모든 승려들을 모이게 한 뒤, 의발을 전해 줄 마땅한 인물을 가리고자 하니 각자 게송을 한 수씩 지어 오라고 말하였다.  신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로다.

 

부지런히 털어 내어, 먼지가 앉지 않도록 할지니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신시보리수    심여명경대
時時動拂拭  勿使惹塵埃
시시근불식     물사야진애

 

 

 혜능대사는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지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명경 또한 대가 아니다.

 

본래 아무런 물건도 없는 것이니 어디서 티끌이 일어나리

 

菩提本無樹  明鏡亦非台
보제본무수    명경역비태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

  

홍인은 두 사람의 게송를 보고 혜능에게 의발을 전했다. 중국 선종의 법맥은 이렇게 홍인에서 혜능으로 넘어갔다. 혜능은 자신을 시기하여 해치려는 사람들을 피해 남쪽으로 도피하여 남선종(南禪宗)을 열었고, 신수는 그대로 남아 북선종(北禪宗)을 열었다.
혜능대사의 법맥을 이은 남악 회양에게서 마조를 거쳐 서당 지장에게로 이어지고 신라의 도의국사에게로 법이 전해진다. 그래서 조계종의 종조는 도의국사가 되고, 이 때가 육조 혜능대사 사후 100여년이 흐른 이후이다.
도의국사는 가지산문을 열고 이를 필두로 선종9산 선문이 모두 조계로부터 남종돈오선을 계승해 오늘에 이르게 된다.
 
이상이 대략적인 초기 조계종의 선맥사이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의 교세는 쇠퇴하여 명맥만 유지하다가 조선후기 경허선사에 의해 다시 부흥기를 맞이하고 이 경허선사의 맥이 오늘의 조계종의 주류 문파를 형성하게 된다.
 
오늘의 주제는 조계종의 선맥사가 아니라 두 게송을 비교하면서 무슨 차이로 인해 법맥이 시골뜨기인 노행자에게 전해졌느냐는 것이다.
신수대사의 게송은 윤리적으로 하나의 흠결이 없는 좋은 교훈적인 게송임에는 틀림이 없다. 중생들의 현실적인 삶의 고통은 이 게송을 통해 많은 부분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신수대사 게송의 한계이다.
불교의 이사(理事)적인 측면에서 볼 때 사(事)적인 측면은 충족시켰으나 이(理)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많이 부족한 게송임에 틀림없다.
신수대사의 게송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지만, 마음공부의 근원적인 자리에서는 도덕도 윤리도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나무도 대도 아니라 한 것은  근본적인 마음자리는 둘로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
주관과 객관은 ‘나’라는 아(我)를 상정한 이후에 성립되는 것이다.
본래 나라는 물건이 없는데 어찌 너라는 물건이 나타날 수 있겠는가?
법의 성품은 이사(理事)가 원융(圓融)하여 한 티끌도 비집고 들 자리가 없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비추어 보았을 때 신수대사의 게송을 점수로 환산하면 50점 정도가 아닌가 한다. 아마 5조 홍인대사도 그리 점수 매겼을 것이다.
육조스님의 게송도 이(理)적인 측면으로 치우쳐 있으니 그리 후한 점수를 줄 수는 없으나, 발전 가능성의 면을 높이 사서, 법을 전해 준 것이 아닌가하고 감히 망상을 피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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