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초성지순례(2/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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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성지순례가 2월16일(일) 스님 세분포함 123명의 대중들이 동참한 가운데
경북 영주 부석사로 다녀왔습니다.
을사년 신년기도를 마무리, 회향하는 의미를 담아 진행되는 정초성지순례는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대중들의 마하반야바라밀 염불소리로 장엄하였습니다.
1시간여 봉행된 기도법회는 동안거 기도를 이끌어주신 무염스님과 향산스님의 인례로
여법하게 봉행되었습니다.
기도법회이후 금강정사 신도회에서 손수 준비해간 찰밥 점심공양으로 대중들과 함께 맛난
점심도 함께했구요.. 공양이후엔 삼삼오오 도량 이곳저곳을 참배하며 성지의 기운도 직접 느껴봅니다.
어느분들은 무량수전에서 108배를 함께 하기도 했으며,
어느분들은 도량 이곳저곳의 전각을 참배하며,
어느분들은 도향포교사님의 사찰안내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셨네요 ^^
정초성지순례의 기운으로 금강정사 중창불사의 원만성취를 발원해 봅니다.
함께했던 시간들.. 사진소식으로 함께하세요~~~~~
부석사 (浮石寺)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세운 화엄종(華嚴宗) 사찰이었다.
부석사의 이름을 직역하면 '땅에서 뜬 돌'이란 뜻인데, 이는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의 설화와 관련이 있다.
의상이 당나라에 유학을 갔을 때, 그를 사모하던 선묘라는 여인이 있었다. 하지만 의상은 승려라서 끝내 선묘의 애정을 거절했고, 의상이 신라로 귀국하자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어서 의상의 귀국 뱃길을 안전하게 지켰다고 한다.
이후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 지역의 도적떼들이 이를 방해하자, 선묘가 큰 바윗돌이 되어서 하늘을 떠다니며 도적들을 물리쳤다. 그 바윗돌이 부석사 뒤뜰에 잇는 큰 바위인데, 지금도 땅에 살짝 떠 있어서 바위 밑으로 줄을 넣으면 통과된다 카더라. 그래서 절 이름이 뜰 부(浮), 돌 석(石)을 써서 부석사라고 전한다.(돌 석 자의 네모 안에 점이 하나 있는데, 바위가 하늘로 떠오르지 않도록 고정한다는 의미로 찍었다고 한다.)
이 설화에 따라, 부석사에는 선묘에게 제례를 지내는 선묘각이 있다.
삼국사기 궁예전에 의하면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립한 후 전국 시찰중에 부석사에 이르었을 때 주지승으로부터 이 곳에 신라 왕의 어진[2]을 모셨다는 말을 들은 후 칼을 내리쳤다고 한다.
김부식은 (집필 당시인 고려 중기 기준으로) 아직도 부석사에 그 칼자국이 남아있다고 밝혔다. 2000년에 방영한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칼을 꽂은 자리에 피가 흘러 내리는 등의 무시무시한 연출도 나왔다. 후에 다른 승려들이 뽑으려 해도 뽑히지 않으나 왕건이 나서서 건들자 뽑히는 것을 보고는 주지승이 신기하게 여겨한다.
고려시대에는 흥교사(興敎寺) 혹은 선달사(善達寺)로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공민왕 21년(1372년)에 주지가 된 진각국사(眞覺國師) 천희(千熙)[4]가 크게 증축했다. 한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중 하나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또한 이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2018년 6월 30일에는 전국 각지에 소재하는 산사들과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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