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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째주 일요법회(4/19,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6-04-19 13:41 조회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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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째주 일요법회가 4월19일(일) 석두스님 법문으로 여법하게 봉행되었습니다.

오늘은 목탁인례 첫 봉사날인 혜광거사님의 인례로 예불과 반야심경을 합송합니다. 

 

법문에 앞서 보현행자의 서원 제8분 주세분을 다함께 합송합니다.

"맹세코 이들 모든 선지식을 공양하고 섬기오면서 그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고

일체불찰 극미진수겁토록 이 세상에 머물러 주시기를 간청하겠습니다."  주세분 中  

 

석두스님 법문동영상은 금강정사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하실수 있습니다.

 

https://youtu.be/osrDTcP5BdM

 

바라밀합창단의 음성공양 소리는 여느때보다 장엄스레 전달되네요. 

합창단은 오늘부터 9시부터 대웅전에서 연습일정을 소화하고 법회에 동참했네요.^^

점심공양은 관음구 식구들의 맛난 국수공양으로 준비됐네요.. 이외에도 

법회의 원만봉행을 위해 수고해 주신 모든분들께 감사와 찬탄의 박수를 올립니다~~~~

 

오늘 법회소식.. 사진으로 함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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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지 않는 것이 애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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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切不留(일체불유)니 無可記憶(무가기억)라

‘모든 것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 기억하여 집착할 바 없음이라.’

虛明自照(허명자조)하니 不勞心力(불노심력)니라

‘허허로이 밝게 스스로 비추니 마음을 쓸 일이 없음이라’

非思量處(비사량처)하고 情識難測(정식난측)이라

‘분별하여 헤아릴 곳 아니니 중생들의 생각으론 헤아리기 어려움이라’

眞如法界(진여법계)는 無他無自(무타무자)니

‘참다운 진여법계는 남도 없고 자신도 없음이라’

要急相應(요급상응)하려면 唯言不二(유언불이)니라

‘어서 빨리 이 자리에 가고자 하면 모름지기 둘이 없음을 말할 뿐이라’


여기서 ‘不留(불유)’는 ‘無住(무주)’와 같은 의미입니다.

육조단경에서는 ‘無念(무념)’을 들어 종지로 삼고, ‘無相(무상)’으로써 본체로 삼고, ‘住(주)’로써 근본을 삼는다고 합니다. 


‘무념’이란 것은 사물을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에 얽매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고, ‘무상’이란 것은 모습(형체)을 인정하면서도 그 모습에 사로잡히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며,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에 세상에 선악이나 미추 또는 원망이나 친밀, 이 모두는 가짜 모습으로서 실체가 아니라 생각하고, 순간순간 의식 속에서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이란 기억의 잔상들의 모임입니다. 

잔상은 무의식인 상태나 의식이 있는 상태나 모두 마음의 활동과 결합될 때에만 기억이란 형태로 저장됩니다.

그 마음의 활동은 과거에 경험으로 체험한 것과 결부시켜 좋거나, 나쁘거나,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세 가지 큰 틀 안에서 경험되고, 기억됩니다.

‘가이 기억이 없다’는 것은 이 기억의 잔상들이 절단되었음을 뜻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되어 삶을 지탱하고 유지하는 기본적인 활동은 거의 무의식 속에서 진행됩니다. 그래서 자고, 먹고, 생리적 현상을 해결하는 것이 노력하여 얻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물론 노화가 진행된다면 그것들이 힘들어 질 수는 있어도, 건강할 때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호흡을 못할 것 같이 염려해서 숨 쉬는 것을 계속 의식한다면, 그 사람은 얼마 있지 않아 숨을 쉬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생각이 숨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오히려 숨 쉬는 자연스러운 행동이 제약되어 구속되었기 때문입니다.

힘 쓰는 곳과 힘 더는 곳을 반대로 하고 있는 경우에, 우리는 자연스러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놓아두면 알아서 잘 굴러갈 것을 염려하고 집착하여 망치는 경우를 우리는 살면서 한 번 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사량처(思量處)’는 중생들의 의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합니다. 또한 중생들의 의식의 한계를 말합니다. 아는 만큼 생각하고, 보이는 것만큼 느끼는 것이 중생들의 의식계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없다는 것은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의식에 의도적으로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면, 의식은 무한하게 확장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생각의 틀을 만들면 그 만큼 의식의 폭은 줄어드는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음으로서 더 잘 움직일 수 있고, 생각을 하지 않음으로서, 생각을 더 잘 할 수 있는 도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여의 세계에 가장 빨리 도달하는 방법은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여의 세계는 행복한 세계입니다. 행복은 의식이 확장되어 마음이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상태에만 가능한 세계입니다. 어쩌면 행복과 불행이란 그 이분법적인 사고를 떠난 세계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것이 모든 것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대자유인’이 불교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표현되는 것이 이 까닭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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