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셋째주 일요법회(8/16,일)
본문
드디어 막바지 장마 끝이라 그런지 습하기가 말할 수 없이 습한 그런 셋째 일요일 아침, 일요법회를 위해 불자님들께서 한분두분 자리를 채웁니다.
청여 부회장님의 집전으로 시작된 일요법회는 하루속히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소멸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아 다함께 합송하는 [보배경]에 이어 총무 동민스님의 명상으로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어진 법문은 [“지금” 이 순간을 잘 다스려 행복을 추구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일요법회도 "생활속 거리두기"에 따라 발열체크, 마스크 착용, 손소독제 사용, 참배시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여법하게 봉행되었는데요. 법회 사회는 도향 거사님, 집전은 청여 거사님, ppt 무주 거사님, 그리고 발원문 낭독 정인 거사님, 차량운행 봉사에 소명 거사님, 주차관리에 거사구, 점심공양 나눔과 발열체크는 보현구에서 봉사해 주셨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 8월 셋째주 일요법회 -
- 코로나19 조기소멸 기원을 담아 다함께 합송하는 보배경 -
- 총무 동민스님의 법문이 있는 셋째주 일요법회 -
- 스님의 법문 "지금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 동하스님과 유진스님께서 무상계를 독송합니다 -
- 감사한 마음으로 잔을 올립니다 -

- 조상님들께 고마움과 감사함으로 머리숙여 절을 올립니다 -
- 정광거사님의 꽃공예품 나누기 -
지금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금강정사 총무 동민스님
우리는 과거에 비추어서 현실을 이해하고, 미래의 목표에 맞추어서 지금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아닌가요?
모든 것은 ‘지금’이 아닌 곳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생각하거나 느껴본 적이 있나요? 그런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아닌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대답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떠한 일도 과거 속에서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미래의 일도 ‘지금’ 속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이 과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속에 저장된 지나간 ‘지금’ 에 대한 기억의 흔적입니다. 과거를 기억할 때 당신은 기억의 흔적을 재가동시켜 ‘지금’의 것으로 작동시키는 것입니다. 미래는 마음의 투사물로 상상 속의 ‘지금’입니다.
미래는 언제나 ‘지금’으로 올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도, 당신은 그것을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그 자체로는 분명 실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의 실재는 ‘지금’ 에게서 빌린 것입니다.
일반적인 꽃들은 꽃잎이 시들면서 씨방이 커져 열매가 되고 그 후에 씨앗이 여무는 것에 비해 연꽃은 특이하게도 꽃잎과 열매와 씨앗이 함께 생기고 익어갑니다. 이것은 중생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몸이 자라나고 동시에 스스로라고 할 수 있는 기억도 함께 쌓여 언제나 ‘자기’ 라는 열매를 맺어 가는 것과 같은 이치를 담고 있습니다.
어느 꼬마에게 ‘너는 몆 살이니?’하고 물었을 때 ‘10살이요’ 라고 대답하는 것은 [자기는 10년 묵은 씨앗]이라는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몸이 10년 자라면서 기억도 10년 쌓이게 되는 것이 꽃과 씨앗이 동시에 ‘지금’ 익어가는 연꽃의 상태와 같습니다.
연꽃이 물 위에서 꽂을 피우듯이, 중생의 꽃이랄 수 있는 몸은 기억의 끝에 찰나적으로 존재합니다. 지금까지 울던 기억이 있는 사람은 갑자기 웃기 어렵고, ‘화’을 잘 내던 사람은 하루아침에 웃지 못하는 것 역시 습관된 인생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어떠한 것을 기억 속에 기억하느냐’ 가 모든 습관(업)을 바꿀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거짓된 앎으로 인한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없애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과 느낌 등을 그때그때 투철하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삶의 모든 현상을 놓치지 않고 그 근거를 들여다보는 수행을 ‘관’ 이라고 합니다.
관수행 가운데 하나인 [사념처 수행]은 삶의 모든 현상이 나타나는 곳, 곧 들여다볼 곳을 네 곳으로 나누어 관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몸의 흐름입니다.
두 번째는 느낌의 흐름입니다.
세 번째는 기뻐하고, 슬퍼하고, 믿고, 뉘우치는 등등의 마음의 흐름입
니다.
네 번째는 ‘이것이다’‘저것이다’‘이런 견해다’하는 등등의 고정 화된 인식과 논리의 근거 법입니다.
이 넷을 잘 들여다봐서 그 특성을 알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아]와 [법]의 분별로부터 자유로워져야만 참된 삶, 고요하고 맑고 고통 없는 삶이 있게 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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