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두스님과 함께 일요법회...

본문 바로가기


참여마당
금강정사 소식

석두스님과 함께 일요법회(6/14,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6-14 13:18 조회2,126회 댓글0건

본문

6월의 전유물인양 푸르고 싱그럽고 때로는 쨍하도록 땡글땡글한 볕이 있는 초여름날 아침입니다.
오늘은 중흥사 주지 석두스님의 법문으로 6월 둘째주 일요법회(6/14,일)가 봉행되었는데요. 스님의 법문“행복에 대한 견해”는 여유를 잃어버리고 오랫동안 굶주리던 마음속으로 단비같이 스르륵 사르륵 스며듭니다.
청정사찰 실천지침을 준수하며 오늘도 발열체크, 방명록 작성과 손소독제 사용, 가피 운영, 점심공양(문수2구) 등 많은 분들이 일요법회를 위하여 “불자”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서 봉사해 주셨습니다. 법회 사회는 진공 거사님, 집전 원경 거사님, ppt 도향 거사님, 그리고 발원문 낭독에 청연심 보살님이었습니다.
함께하신 모든 분들께 찬탄의 박수를 올리며, 코로나19의 조기종식을 발원해 봅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1.jpg

- 6월 둘째주 일요법회 -

2.jpg

- 코로나19 극복과 치유를 위해 다함께 합송하는  [보배경] -

3.jpeg

- 석두스님의 법문 " 괴로움은 있으나 괴로움을 느끼는 실체는 없다" -

4.jpg

- 스님의 법문은 마음의 키를 키웁니다 -

5.jpg

- 발열체크, 방명록 작성, 손소독은 기본 -

6.jpg

- 이렇게 열심히 세탁하다가 좌복이 다 닳아 없어지는건 아닐까요? -

[복사본] 봉사자.jpg

 

괴로움은 있으나 괴로움을 느끼는 실체는 없다



                                                           중흥사 주지 석두스님



이 글의 제목을 듣자마자, 정확히 전달할 수는 없으나 이해가 바로 일어난다면 당신은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불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절을 다니고,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고, 승가를 따른다고 말들은 하지만, 절에 오래 다닌 불자조차 이 글의 제목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 수 있을까요?
절에 다니는 많은 불자들의 수만큼이나 절에 다니는 이유 또한 다양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유를 한 단어로 압축하면 그것은 ‘행복’입니다.

우리는 행복해지려고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돈이 행복의 척도이면 돈을 벌 수 있는 궁리를 해야 하고, 사랑이 행복의 척도인 분은 사랑하고 사랑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야 하고, 건강이 행복의 척도인 분은 건강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야 하는 것은 다들 잘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런 물질적, 외부적인 만족이 채워지면 진정 행복할까요?
교리를 달리하는 모든 이 세상의 종교가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은 늘 한결같이 이 마음에서 행복을 찾으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먼저 붓다께서 말씀하시는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내 삶의 무의식적 나침판이 되었던 고정관념을 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노력을 통해 나의 생각에 변화가 옵니다.
그 변화가 생각을 바꾸고, 그 바뀐 생각을 통해 또 변화가 오는, 불교적 선순환의 고리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바꾸어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들을 합니다. 그만큼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그 어려운 생각을 바꾸는 작업을 하려고 절에 다니고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 나의 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몸에 대한 기존의 나의 생각을 바꾸고, 마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서 마음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바꿀 때만이 우리는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견해를 바꾼다’ ‘인식을 바꾼다’라고 말합니다.
몸에 대한 바른 이해는 몸은 실재하나 이 몸은 나의 몸이 아니라는 견해를 새롭게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마음의 작용은 있으나 마음이라는 존재는 오온의 화합과 인연에 의해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견해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존재들은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고 무의식적인 견해를 가지고 말합니다. ‘나의 것’이라는 실재적인 존재를 상정하면 ‘나의 괴로움’이 됩니다. ‘나’라는 그 놈만 해체해 보면 육신의 화합이고 마음의 화합일 뿐입니다.
‘내가 누리고 내가 받는다‘는 견해는 갖고 있는 한 행복은 저 멀리 달아납니다. ‘나’라는 생각은 ‘남’을 상정하고 하는 분리의 단어입니다. 나의 행복은 남의 불행일 수도 있고,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일 수 있습니다. ‘행과 불행’은 인연에 의해 나타나는 헛깨비 같은 것들입니다. 사람을 통해 위로 받은 사람에게 사람과의 교류는 치유이자 힐링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상처만 받은 사람에게 다른 이와의 교류는 괴로운 기억을 되살리는 고통일 뿐입니다.
그럼 다른 존재는 나에게 위안입니까? 고통입니까?
단지 인연에 의해 나타난 것을 우리는 ‘행복’ ‘불행’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실체적인 존재로써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연에 의해
그렇게 불리게 될 뿐입니다.
그저 작용만 있을 뿐 실체는 없는 것입니다. ‘행복’은 내가 작용하고 내가 영향을 받을 뿐, 밖에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갖는다면 지금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수용하게 될 것이고 ‘苦’는 자연스럽게 멀어질 것입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금강정사안내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서비스 이용약관 | 오시는 길 | 사이트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