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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정사 소식

보일스님 초청법회(1/18,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6-01-18 17:14 조회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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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만나서 다행이야.... 

1월 3째주 일요법회가 1월18일(일) 보일스님(AI부디즘 연구소장)을 모시고 여법하게 봉행되었습니다. 

 

법문에 앞서 보현행자의 서원 찬양분을 다함께 합송합니다. 

"부처님께 예경하겠습니다. 일체 세계 일체 국토에 계시는 미진수 부처님께 예경하겠습니다."

 

오늘 법회는 AI시대, 미술로 고통을 어루만지다를 주제로 PPT화면을 보면서 색다른 법회로

봉행되었네요. 보일스님의 법회영상은 추후 금강정사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하세요~~~

법회이후 보일스님 신간 "미술관에 간 스님" 저자사인회도 진행되었습니다..

 

법회봉행을 위해 수고해 주신 분들입니다. 

바라밀합창단의 음성공양과 올해 1월부터 첫 3째주 일요일 정기봉사를 시작한 관음구 식구들이 

점심공양을 준비합니다. 

사회는 지승거사님께서, 집전은 청여 자문위원님께서, PPT는 여래행보살님, 그리고 발원문 낭독은 

신도님들을 대표해서 보현구 청산거사님께서 함께 해 주셨네요.. 

법당밖에서 차량봉사와 가피봉사, 주차봉사자들의 바쁜 발걸음이 일요법회에 오시는 분들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리고 법회후 관음구에서는 큰스님을 모시고 교육관에서 신년모임을 진행합니다... 

모두모두에게 감사와 찬탄의 박수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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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시대, 미술로 고통을 어루만지다.


                              AI부디즘 연구소장 보일스님


 AI가 일상 곳곳에 스며든 요즘, 우리의 삶은 마음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다음 정보가 밀려오고, 감정이 스며들기도 전에 화면은 또 다른 장면으로 전환됩니다. 인공지능은 이제 인간보다 더 빠르게 판단하고, 더 정확하게 계산하며, 더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냅니다. 편리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 질문하고 느끼는 사유의 근육이 무뎌지고 있습니다. 이 변화 속에서 우리는 종종 묻습니다. “이 시대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인가.”


  부처님은 우리의 삶을 한마디로 ‘고(苦)가 가득한 길’이라 해서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고통은 큰 병이나 사고만이 아니라, 늘 마음 밑바닥에 흐르는 불안과 외로움, 남과 비교하며 느끼는 불만족까지를 두루 가리킵니다.그래서 부처님은 네 가지 진실, 사성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이 있다는 것(苦聖諦), 둘째, 그 괴로움의 뿌리가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갈망과 집착이라는 것(集聖諦)입니다. 셋째, 이 집착을 알아차리고 놓아버리면 괴로움이 그칠 수 있다는 것(滅聖諦), 넷째, 그 길이 바로 바르게 보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등의 팔정도의 수행이라는 것(道聖諦)입니다. 이렇게 보면 고통은 형벌이 아니라, 방향을 알려 주는 신호입니다.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꼭 쥐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라”라고 조언하십니다. 이 고통은 옛 인도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스마트폰 속에서, 관계의 갈등 속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멈추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만족하지도 못한 채 더 많은 정보와 자극을 찾게 만드는 힘, 이것이 바로 AI 시대, 집착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불교가 고통을 집요하게 분석하는 이유는 비관에 빠지기 위함이 아니라, 고통을 직시함으로써 해방으로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진흙이 없으면 연꽃도 없습니다. 고통이라는 진흙은 우리를 더럽히는 오물이 아니라, 깨달음과 자비라는 연꽃을 피워내기 위한 필수적인 영양분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깊이 이해할 때 비로소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는 자비심이 생겨납니다. 예술은 바로 이 지점에서 불교와 만납니다. 위대한 예술은 고통을 회피하거나 잠시 잊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진흙을 재료 삼아 미적 승화라는 연꽃을 피워내는 과정입니다.

고흐, 툴루즈 로트렉, 프리다 칼로, 마크 로스코 등등 그림이 바로 그렇습니다.

 

오늘날 AI는 효율과 최적화를 최고의 가치로 삼지만, 수행의 길은 언제나 비효율적인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잠시 멈추어 서는 일, 쓸모를 따지지 않는 일, 결과를 서두르지 않는 일이 곧 수행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예술, 그 중에서도 미술 감상이 가진 내면의 감각을 회복시키는 힘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미술관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즉각적인 답을 얻지 못합니다. 그림은 설명하지 않고, 침묵으로 서 있습니다. 색채와 형상, 여백은 우리에게 판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때 작동하는 것은 분석 능력이 아니라, 감응하는 마음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觀)은 단순히 보는 행위가 아닙니다. 대상을 소유하지 않고, 결론을 서두르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머무는 태도입니다. 시선을 끄는 그림 앞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저절로 이 관의 상태에 들어갑니다. 좋아함과 싫어함 이전의 마음 상태, 말로 옮기기 전의 감각이 살아납니다. 

 

   AI는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해 내고, 음악을 작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동을 ‘겪는 일’은 대신해 주지 못합니다. 감동은 정보가 아니라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음에 흔적을 남기고, 삶의 리듬을 바꾸며,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서서히 전환합니다. 물론 미술 감상만이 인간의 고유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는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일상에서 인간의 감각을 다시 깨우는 훌륭한 방편 중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계산되지 않는 감정, 즉시 환원되지 않는 여운을 허락할 때, 우리는 AI가 흉내 낼 수 없는 깊이를 회복합니다. 


수행이란 특별한 기술을 익히는 일이 아닙니다. 점점 둔해지는 감각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일입니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설명되지 않는 것 앞에 서 보십시오. 그림 한 점, 조각 하나, 혹은 빛과 그림자가 만든 장면 앞에서 잠시 머무르십시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알고리즘의 시선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오로지 나의 눈, 나의 호흡, 나의 감각으로 세계를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수행과 다르지 않습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내 안에서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을 알아차리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AI의 시대일수록, 인간은 더 인간다워져야 합니다. 미술을 감상하는 일 또한  단순히 취미가 아니라 훈련이자 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감동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그것이 바로 AI 시대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도 깊은 대안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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