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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55년 9월 7일(수) 호법법회(회주스님)

작성자 금강정사 작성일11-09-07 17:11 조회7,9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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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7일 수요일 호법법회


법문 : 회주스님

주제 : 대각국사 의천스님

시간 : 10시30분


9월7일 호법법회는 회주스님께서

대각국사 의천스님의 생애를 비춰보며 

우리불자들이 조그마한 깨달음이라도 얻을 수 있도록

법문을 진행하십니다.

부디 참석하셔서 수행정진에 많은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 법     문--------------------------
 

대각국사는 우리나라 천태종을 처음으로 개창한 고려시대의 스님이다. 송악(개성)출신으로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이며, 스님은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의 왕자였던 의천스님은 11세에 출가하여 13세의 나이로 승통에 임명되었고 23세 때부터는 불교 경전을 강의하는 등 학식과 이론을 갖추었다.

스님은 경전 연구와 고려 불교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 큰 뜻을 품고 1084년 송나라로 건너간다. 그리고 황제인 철종의 환대 속에서 중국 계성사에 머무르며 유성법사에게 화엄사상과 원정법사에게 천태사상을 배우는 등 고승 50여명과 불법을 교류했다. 그 후 스님의 형인 선종임금과 어머니인 인예왕후에게서 속히 귀국하라는 청을 받고 송나라에서 수집한 불서 3천권을 가지고 돌아와 흥왕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곳에서 의천스님은 교장도감을 설치해 『교장』의 목록에 해당하는 「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펴냈다. 이것은 스님이 수집한 불교 장서를 정리한 것으로, 이 목록은 지금까지도 불서 목록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에 속한다고 한다.

스님은 이후에도 고려는 물론 송나라, 거란, 일본에서도 계속해서 불서를 수집하여 입적하실 때까지 1,010부 4,740권의『교장』을 간행했다.『교장』은 동아시아에서 한자로 기록된 불교 연구논문을 모은 총서이자 전집으로, 당시까지의 동아시아 불교 연구의 총집성이다. 의천스님이 간행한『교장』은 현종, 선종 때 이룩한『초조대장경』에 이은 후속편을 뜻하는 '속장경'으로도 불린다.

당시 고려 불교계는 왕실 측의 화엄종과 귀족 세력의 법상종, 선종 등으로 열되어 있었다. 의천스님은 화엄종과 선종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선교 통합의 일원으로 천태종을 개창하고자 했다. 그리고 국청사 완공과 함께 그곳에서 천태학을 강설했고, 선종 스님 천여 명이 천태종으로 옮겨옴으로써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의천스님은 교종의 입장에 서서 천태학을 중심으로 선종을 포용함으로써, 신라의 원효대사 이후 원융회통(圓融會通)의 전통을 실현시키려 했던 것이다.

의천스님은 우리 화폐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의천스님은 주화 사용이 물운반의 수고를 덜고 재화 보관을 편리하게 만드는 등 현물 유통에 비해 지니는 장점을 주장해 화폐를 유통시켰다. 스님은 이처럼 나라의 큰일을 임금과 논의하고 조언하는 역할까지 했다. 숙종은 의천스님이 입적하시기 이틀 전 스님을 국사(國師)로 책봉했고 이후 대각국사(大覺國師)로 불리게 되었다.

국사는 성인의 도를 갖고 태어나 배움에 뜻을 두고 세속의 영광에 조금도 미혹치 않았다. 도덕이 쇠퇴하고 학문이 황폐해가는 시대에 홀로 그런 세태를 거슬러 사신 분이다.'

대각국사 의천스님이 출가한 개성 영통사에 있는 '대각국사비'에 김부식이 기록한 글이다. 의천스님은 11세에 출가해 47세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구법과 수행, 학문과 강학으로 일생을 살았던 대표적 고승이면서 탁월한 불교학자 였다. 스님은 선(禪)과 교(敎)의 수행을 함께 했으며, 선종인 조계종과 교종인 화엄종의 선교 통합을 위해 평생 노력했다. 또한 고려 불교개혁과 '교장' 간행에 힘써 우리 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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